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문단 편집) == 노년 == || [[파일:external/www.uni-konstanz.de/Hayek-20_jpg.jpg|width=260]] || || 노년의 하이에크 || 그는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학계의 주류로부터 떨어져 있던 인물에게는 의외의 일이었다. 공동 수상자였던 [[군나르 뮈르달]]과 균형을 맞추어 보이게 하기 위한 정치적 수상이었다는 반응이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학계에서의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생겨나면서 케인즈적 접근법이 불신을 받게 되었다. 사회주의 계산 논쟁이나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 또한 재평가받게 되었다. 그후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강연하였고, 1978년엔 내한한 바도 있다. 그는 꾸준히 [[https://ko.wikiquote.org/wiki/프리드리히_하이에크|시장경제를 옹호하였다.]] 다만 말년에는 "큰 시장은 큰 정부를 부른다"라는 말로 입장을 바꿨다고 한다. 하이에크는 정치인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기 쉽다고 경고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하락하고, 다시 노동자는 하락한 실질임금을 보전받기 위해서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게 되고, 이는 다시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켜 결국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으로 빠져들게 만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공황 이후 케인즈 경제학이 주류가 되어 큰 정부가 대세가 되었으나 1970년대에 이르자 차차 세계경제는 정부 지출을 확대해도 실업률은 떨어지지 않고 불경기는 계속되면서 인플레이션만 찾아왔다. 불경기에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하이에크의 주장에 매료된 영국의 대처 수상은 하이에크 처방대로 경제정책을 실시했다. 1979년 정권을 잡은 [[마거릿 대처]] 수상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통화를 풀고 정부 지출을 늘리라는 케인스식 처방을 거부했다. 높은 실업률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악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했다. 한편으로는 정부 소유 사업을 매각하고,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을 줄이고, 창업을 권장하고 개인의 소득세율을 낮추었다. 대처 수상은 하이에크의 주장대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경제 자유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경제 정책을 펼쳐서 '[[영국병]]'을 고치고 영국을 구조 조정하고자 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경제 참모로 하이에크파를 대거 기용했다. 레이건의 경제정책은 [[레이거노믹스]]라고도 부르는데 레이건의 연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경제학자가 바로 하이에크였다. 레이건과 대처의 시대에 하이에크는 대단한 영예를 누렸다. 마거릿 대처는 하원에서 하이에크야말로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공산권이 무너질 때의 영예는 굉장했다. 이러한 굉장한 영예 속에서, 그는 1992년에 눈을 감았다. > (전략) 그리고 그가 죽기 몇 년 전에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것도 지켜보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하이에크의 아들 로렌스 박사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말했다. >"아버지. 지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구요!" >이 때 하이에크가 한 말은 간단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 >주용식 外 5人, 『자유주의 사상가 12인의 위대한 생각』, 월간조선사, 2004, p.14, p.1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